[기고] 기차가 화천에 도착한 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 화천역에서 시작되는 '하루 더 머무는 도시'를 꿈꾸며
류종현 | 강원대학교 객원교수·한국지역경제학회장
몇 년 뒤 어느 겨울 아침을 상상해 본다.
서울에서 출발한 KTX 열차 한 대가 화천역에 들어온다. 문이 열리고 아이의 손을 잡은 가족이 내린다. 산천어축제를 보러 온 사람들이다. 예전 같으면 자동차로 먼 길을 달려와 축제를 즐기고 다시 서둘러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차를 타고 편하게 화천에 온다.
여기까지는 철도가 만들어 주는 변화다.
그다음부터는 화천의 몫이다.
이 가족은 역에서 어디로 갈까. 축제만 보고 오후 열차를 타고 돌아갈까. 아니면 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시장을 둘러볼까. 북한강을 걷고 저녁을 먹은 뒤 하룻밤을 묵을까. 다음 날에는 평화의 댐과 DMZ까지 둘러보고 돌아갈까.
나는 화천역 시대의 성패가 바로 이 차이에서 갈린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화천까지 데려오는 것은 철도지만, 그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것은 도시다.
길이 열린다고 지역이 저절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도로나 철도가 놓이면 지역이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해 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교통이 좋아지면 사람도 오고 기업도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길에는 방향이 두 개다.
서울에서 화천으로 오는 길이 가까워지는 만큼 화천에서 춘천과 수도권으로 나가는 길도 가까워진다. 화천에 머물 이유가 부족하다면 사람과 소비가 오히려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동서고속화철도 시대를 준비하면서 "역 주변에 무엇을 지을까"부터 고민해서는 안 된다.
먼저 물어야 한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에게 화천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 하루 더 머물 이유를 줄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화천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겨울이면 산천어축제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온다. 여름이면 토마토축제가 열린다. 북한강이 흐르고, 조금만 이동하면 평화의 댐과 DMZ를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파크골프를 하기 위해 화천을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스포츠와 전지훈련 자원이 있고, 교육과 AI를 연결할 새로운 가능성도 생기고 있다. 농산물과 산림, 깨끗한 자연도 있다.
다른 작은 도시에서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부러워할 자산들이다.
그런데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
이 좋은 것들이 아직 서로 충분히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천어축제를 보러 온 사람이 파크골프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파크골프를 하러 온 사람이 읍내와 북한강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다. 평화의 댐을 찾은 사람이 저녁까지 화천에서 머물 이유도 많지 않다.
보석은 많은데 아직 하나의 목걸이가 되지 못한 셈이다.
화천역은 이 보석을 꿰는 실이 되어야 한다.
역 앞에 모든 것을 만들 필요는 없다.
새로운 역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역 주변 개발 이야기가 나온다. 상가도 만들고 음식점도 만들고 새로운 시설도 넣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신중해야 한다.
화천역 앞에 새로운 상권을 크게 만들면 기존 화천읍 상권은 어떻게 될까.
기차를 타고 온 사람이 역 앞에서 먹고 사고 다시 돌아가 버린다면 철도가 들어왔는데도 정작 기존 상인들은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화천역의 역할을 조금 다르게 생각했으면 한다.
역은 목적지가 아니라 화천으로 들어가는 문이어야 한다.
역에서 내리면 자연스럽게 읍내로 이어져야 한다. 읍내에서 화천 음식을 먹고 시장과 가게를 둘러본다. 북한강으로 이동해 걷고 자전거를 타고 수변을 즐긴다. 파크골프를 치거나 스포츠를 체험한다.
저녁이 되면 다시 읍내에서 밥을 먹고 숙박한다.
다음 날에는 평화의 댐과 DMZ로 향한다.
이렇게 되면 화천역 하나가 새로운 상권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화천 전체를 하나의 여행지로 묶는 출발점이 된다.
이제 '화천에 꼭 가야 할 이유' 하나를 만들자.
연결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사람들에게 "이것 때문에 화천에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도 필요하다.
거대한 건물을 하나 짓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북한강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수변공간일 수도 있다. 숙박과 음식, 레저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곳이다.
파크골프를 더 크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경기장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전국대회와 교육, 전지훈련, 스포츠관광과 관련 산업까지 모이는 대한민국 대표 파크골프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화천의 교육자원과 AI, DMZ와 평화를 결합해 전국의 아이들과 가족이 찾아오는 미래체험도시를 만드는 상상도 가능하다.
이런 것을 '앵커 프로젝트'라고 한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는 닻처럼 사람과 소비, 기업을 지역에 붙잡아 두는 중심사업이다.
하지만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세 가지를 모두 크게 벌이는 것보다 화천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하나를 먼저 제대로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답을 공무원만 찾을 필요도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을 바꿔보면 좋겠다.
지금까지 지역에서는 행정이 계획을 세우고 기업을 찾아가 "우리 지역에 투자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반대로 물어보자.
관광기업에게 묻자.
"당신이라면 북한강에서 어떤 사업을 하겠습니까?"
스포츠기업에게 묻자.
"파크골프의 가능성을 산업으로 키운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교육과 콘텐츠기업에게도 물어보자.
"AI와 DMZ를 연결하면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답이 나올 수도 있다.
화천의 미래를 행정 혼자 그릴 필요는 없다. 주민도 참여하고 기업도 참여하고 전문가와 청년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행정은 문을 열고, 민간은 상상하고, 전문가는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
그 과정에서 화천다운 답을 찾아야 한다.
처음부터 큰돈을 쓸 필요는 없다.
나는 오히려 처음에는 작게 시작했으면 한다.
몇 억 원짜리 계획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정책연구부터 시작해 보는 것이다.
철도가 들어오면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살펴보고, 화천의 자산 가운데 무엇이 가장 경쟁력이 있는지 다시 따져보자. 북한강과 파크골프, AI교육과 DMZ 가운데 무엇이 사람을 더 오래 머물게 하고 기존 상권에 더 도움이 되는지도 비교해 보자.
기업과 전문가에게도 직접 물어보자.
그런 다음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하나를 골라 제대로 조사하면 된다.
작게 연구하고, 제대로 고르고, 선택한 곳에 크게 투자하는 것이다.
지역의 돈을 아끼는 방법도 결국 선택을 잘하는 데서 시작한다.
몇 년 뒤 다시 화천역을 상상해 본다.
아침 열차에서 한 가족이 내린다.
역에서 안내를 받은 뒤 읍내로 향한다. 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북한강을 걷는다. 아이들은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부모는 강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저녁에는 화천 음식을 먹는다.
"그냥 오늘 돌아갈까?"
누군가 묻는다.
그러자 아이가 말한다.
“내일 평화의 댐도 가고 파크골프도 해보자.”
가족은 하루 더 머물기로 한다.
다음 날 오후 화천역으로 돌아온 가족의 손에는 지역 농산물과 작은 기념품이 들려 있다.
그리고 말한다.
“다음에는 여름에 한번 와보자.”
나는 이것이 화천역 시대의 진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몇 명이 열차에서 내렸느냐보다 몇 명이 읍내까지 갔는가.
몇 명이 관광지를 방문했느냐보다 몇 시간을 화천에서 보냈는가.
방문객 숫자보다 지역에서 얼마를 소비하고 몇 명이 다시 찾아왔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
동서고속화철도는 국가가 놓는다.
그러나 그 철도에서 내린 사람의 다음 발걸음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산천어축제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상상이었다. 오늘의 파크골프도 처음부터 지금 모습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다.
지역의 미래는 언제나 작은 상상에서 시작된다.
이제 화천역이라는 새로운 기회가 오고 있다.
기차가 화천에 도착한 뒤, 그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써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첫 문장은 이것이면 좋겠다.
“화천에 왔으니, 하루 더 머물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