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물 부족 국가’라는 오해, 이제 ‘물 관리’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최광선 前화천군의회부의장>
말복이던 지난 14일, 지역 농가 이웃들과 삼계탕 한 그릇을 나누며 담소를 나눴다. 그러나 식사 자리의 화두는 몸보신이 아니었다. 쩍쩍 갈라진 논밭과 타들어 가는 농작물이었다.
땀 흘려 키운 작물이 메말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농민들의 속은 바짝 마른 흙보다 더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현장에서 들은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물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었다. 한 해 농사를 지켜내야 하는 농민들의 절박한 탄식이자 생존을 위한 절규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UN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UN이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물 부족 국가로 지정했다는 주장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과거 국제인구행동연구소가 1인당 이용 가능한 수자원량을 기준으로 한국을 ‘물 스트레스 국가’로 분류한 내용이 국내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UN 지정 물 부족 국가’로 굳어진 측면이 크다.
그렇다고 우리의 물 문제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강수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라기보다, 비가 특정 계절과 짧은 기간에 집중되고 지역별 편차가 큰 나라다. 산지가 많고 하천 경사가 급해 한꺼번에 내린 비가 빠르게 하천과 바다로 흘러가는 지형적 특성도 있다. 비가 올 때는 홍수를 걱정하고, 비가 그치면 가뭄을 걱정해야 하는 역설이 반복되는 이유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단순한 ‘물 부족 국가’라기보다, 물을 필요한 시기와 장소에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공급하는 체계를 더욱 촘촘히 갖춰야 할 ‘물 관리가 중요한 국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해결책은 거대한 토목사업에만 있지 않다. 가뭄에 취약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중소규모 저수지와 친환경 둠벙, 빗물저장시설 등을 확충하고, 기존 저수지와 관정·양수장·용수로를 정비하는 생활권 단위의 세밀한 물 관리가 필요하다.
지역의 지형과 농업 여건을 가장 잘 아는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돼 상습 가뭄지역과 농업용수 취약지부터 우선순위를 정하고, 주민과 농민이 참여하는 지역 맞춤형 물 관리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분산형 물 저장시설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빗물을 필요한 시기에 활용할 수 있는 지역의 ‘물 저금통’이 된다. 토질과 입지에 따라 저장된 물의 일부가 땅속으로 스며들면 지하수 함양과 지역 물순환 회복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 농업용수 공급의 안정성을 높여 농가의 생존권을 지켜준다. 기후위기로 가뭄과 폭염이 잦아지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농업용수는 선택적인 지원이 아니라 식량 생산과 농촌공동체를 지키는 필수 기반시설이다.
셋째, 사후 복구 중심의 재난행정에서 예방 중심의 행정으로 전환할 수 있다. 가뭄이 닥친 뒤 급수차를 동원하고 관정을 급히 파거나 피해복구비를 지급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평상시 물 저장시설과 공급망을 정비하는 예방적 투자가 장기적으로 더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다.
넷째, 제대로 조성하고 관리한 둠벙과 소규모 수변공간은 농촌 생태계의 다양성을 높이고 야생생물의 서식처 역할도 할 수 있다. 다만 무분별한 개발이 되지 않도록 수질과 토질, 생태환경, 주민 안전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물 관리의 핵심은 비가 많이 내릴 때 안전하게 받아두고, 물이 부족할 때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데 있다. 그러나 단순히 물길을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저장과 공급, 수질과 생태, 홍수와 가뭄을 함께 고려하는 유역 중심의 통합적 관리가 필요하다.
기후위기가 일상이 된 지금, 가뭄이 발생할 때마다 임시방편을 되풀이하는 행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느 마을에 물이 부족한지, 어떤 작물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지, 기존 저수시설과 용수공급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정확히 조사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지역별 농업용수 지도를 만들고, 저수지와 둠벙, 관정, 양수장, 용수로를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가가 재정을 지원하고 지자체가 현장에 맞게 설계하는 ‘지역 맞춤형 물 관리사업’을 상시적인 국가정책으로 추진해야 한다.
물이 없으면 농업도 없고, 농업이 무너지면 농촌의 삶도 지속될 수 없다. 농민들에게 물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한 해의 소득이며 가족의 생계이고, 농촌을 지켜내는 생명줄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라는 익숙한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대책이다. 하늘에서 내린 물을 어떻게 담고, 나누고, 아껴 쓸 것인지에 국가와 지방행정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물이 없다”는 농민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가뭄이 닥친 뒤 움직이는 복구행정이 아니라, 가뭄이 오기 전에 준비하는 예방행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빗물을 흘려보내고 하늘만 원망할 것인가. 아니면 물 한 방울까지 소중히 담아 농민과 농촌의 내일을 지켜낼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물 부족’이라는 막연한 인식에서 벗어나 ‘물 관리’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국가 수자원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