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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공무원의 경험, ‘행정의 품격’인가 ‘회피의 기술’인가

기사입력 2026-08-3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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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공무원의 경험, ‘행정의 품격’인가 ‘회피의 기술’인가

 

요즘 행정기관의 문턱을 넘다 보면 겉으로는 지극히 절제되고 정당한 절차를 밟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중한 언어와 합법적인 절차 뒤편에서 민원인을 지치게 해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드는 정교한 ‘회피의 기술’이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오랜 공직 경험이 문제 해결의 지혜가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기술로 쓰이는 것이다.


차라리 업무를 잘 몰라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라면 상대방도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다. 정작 사람들을 깊이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법령의 틈과 절차적 재량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공무원이 그 경험과 정보를 상대방을 돕는 데 쓰지 않고, 책임을 피하거나 민원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방패로 악용할 때다.


전문성과 경험이 깊이 요구되는 업무일수록 이러한 문제는 더욱 은밀하고 치명적이다. 겉으로는 철저한 법리 검토와 보완 절차를 이행하는 모양새를 갖추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당사자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요건을 거듭 내세워 피로감을 느끼고 발길을 돌리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인지, 민원인을 포기시키기 위한 절차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심지어 일부 베테랑 공무원은 민원 처리 과정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현장을 조정하고 해결책을 찾기는커녕 “저 구조물부터 철거하고 오라”는 식으로 소관 부서의 공식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까지 마치 확정된 조건인 것처럼 요구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직접 판단하거나 처분할 권한이 없는 사안임에도 충분한 법률 검토나 관계 부서와의 공식 협의 없이, 다른 부서의 업무를 끌어와 ‘안 되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업무 회피를 넘어 정보와 권한의 우위를 이용해 민원인의 선택과 대응을 제한하는 월권적 행정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담당 부서에 공식적으로 협의를 요청하고, 그 결과와 법적 근거를 민원인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자신의 판단만으로 다른 부서의 권한까지 앞세워 민원인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행정기술자’의 행태는 민원인에게 좌절을 안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양심적인 동료들 역시 깊은 무력감과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회피한 책임과 그로 인해 커진 민원인의 불신은 결국 조직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제 막 공직에 들어선 후배들이 무엇을 배우게 되느냐는 점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명의식 대신 ‘책임지지 않고 돌려보내는 방어의 기술’을 능숙한 공직 생활의 노하우로 오인한다면, 잘못된 행정문화는 세대를 거쳐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전문 지식과 경험은 타인 위에 군림하거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쌓은 특권이 아니다. 정보의 열세에 놓인 사람이 길을 잃지 않도록 쉬운 말로 안내하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가능한 대안을 찾아내라고 국가와 사회가 맡긴 책임이다.


그러나 일부 행정기술자는 규정의 취지를 살펴 가능한 길을 찾기보다 ‘안 되는 이유’를 찾는 데 더 능숙하다.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고, 관계 부서의 업무까지 핑계로 끌어들여 민원인을 지치게 한 뒤 사안을 유야무야 넘기는 것을 마치 능숙한 업무 처리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행정의 능력이 아니라 행정의 실패다.


민원인이 행정에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담당자가 오랜 경력에서 비롯된 정보의 우위를 이용해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느낌, 해결하려는 의지 없이 절차와 권한 뒤에 숨어 시간을 끌고 있다는 불신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모든 민원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법과 원칙에 따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안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결과가 불가능하더라도 그 이유와 법적 근거를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투명하게 설명하고, 가능한 대안을 함께 고민했다면 민원인은 비록 결과에는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을 존중하고 행정을 신뢰할 수 있다.


민원인을 교묘하게 돌려보내거나 권한 밖의 요구로 압박하는 것은 공무원의 실력이 아니다. 진정한 행정전문가는 자신이 가진 경험과 정보의 우위를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이다.


반면 오랜 경력과 법령 뒤에 숨어 민원인을 지치게 만드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연차와 전문지식을 갖췄더라도 ‘행정기술자’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동료에게는 회의감을 주고 후배에게는 잘못된 행정의 유산을 남기는 행태가 결국 조직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베테랑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규정을 외우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복잡한 규정 속에서도 주민이 갈 수 있는 길을 얼마나 정확하게 찾아주는가에 있다. 안 되는 일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될 수 있는 방법을 끝까지 찾아보는 것은 더욱 큰 능력이다.


좋은 행정은 절차와 권한을 무기로 상대방을 이기는 행정이 아니다. 공직자에게 필요한 것은 일을 피하는 정교한 기술이나 권한의 과도한 확장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의 고충을 성실하게 살피는 양심과 자신의 판단에 끝까지 책임지는 소명의식이다.


행정의 출발점은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그 행정이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자리 역시 사람의 삶이다.
김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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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신문 (inews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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