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에세이] 일흔 즈음에, 다시 사람을 생각하다
서른 즈음에는 무엇이 떠나가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살았다.
하루가 또 하루를 밀어냈고,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졌다.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앞만 보고 걸었다. 기자로서 세상의 잘못을 찾아내고, 옳고 그름을 가려 글로 남기는 일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세월을 건너 어느덧 일흔 즈음에 섰다.
지금 돌아보면 많은 일이 있었다.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녔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행정과 권력의 잘못을 지적했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도 했다. 때로는 맞섰고, 때로는 내가 쓴 글로 인해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기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언론의 역할에 대한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하고,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며, 공동체가 나아갈 길을 묻는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일흔을 앞두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사실을 밝히는 데 힘을 쏟으면서도 사람의 마음까지 충분히 헤아렸는가.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었는가.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내 판단을 앞세우지는 않았는가.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상대방의 사정과 형편을 놓친 적은 없었는가.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내 주제도 모르고 잘난 척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한동안은 내 주변 사람들을 나름대로 나누어 보기도 했다. 함께 있으면 힘이 되는 사람, 만나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을 구분하려 했다.
살아가면서 관계에 지치고 상처받다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에게 좋은 사람은 누구이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가려내고 싶어진다.
그런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다.
나에게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를 묻기 전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먼저 물어야 했다.
나는 누군가가 잘됐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는가. 힘들다는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었는가.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 생각과 방식을 따르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는가. 밖에서 받은 피로와 서운함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풀지는 않았는가.
돌이켜보면 오랜 기자 생활을 통해 몸에 밴 습관이 일상과 인간관계에서도 드러났던 것 같다.
사실인지 아닌지 따져보는 습관 때문에 가까운 사람의 말조차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무엇이 잘못됐는지부터 찾았고, 상대방의 마음보다 해결책을 먼저 말하려 했다. 기다려 주기보다는 빨리 결론을 내리고 정리하려 했다.
취재 현장에서는 필요했던 태도가 가까운 사람에게는 부담이 됐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너그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살아온 경험이 많을수록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도 강해졌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말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막았을 수도 있고, 젊은 사람들의 서툰 선택과 시행착오를 기다려 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춰 보려 한다.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정말 상대방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돌아본다. 답을 주려고 서두르기보다 먼저 듣고,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지적하기 전에 나의 부족함부터 살피려 한다.
그렇다고 잘못을 보고도 모른 척하며 살겠다는 뜻은 아니다.
부당한 일이 있다면 앞으로도 말해야 한다. 힘없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정과 권력이 있다면 사실을 확인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기자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책임이다.
다만 이제는 잘못을 밝히는 일과 사람을 함부로 단정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잘못은 분명히 지적하되 사람까지 미워하지 않고, 비판하더라도 다시 바로잡을 길을 함께 찾고 싶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글을 쓰고 싶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려는 마음이 아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재단했던 마음이다.
일흔 즈음에 돌아보니 세월과 함께 멀어진 것들이 적지 않다.
한때는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여겼던 일도 이제는 희미해졌다.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새 멀어지기도 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난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많은 것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미처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사람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한 순간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서른 즈음에는 떠나가는 것들을 붙잡고 싶었다면, 일흔 즈음에는 내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누구와 함께했는지, 얼마나 옳은 말을 했는가보다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세상에 남긴 글보다 내 곁의 사람들에게 남긴 말과 표정이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여전히 내 안에는 내려놓지 못한 것들이 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내가 옳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서운한 일을 당하면 화가 나고, 누군가 내 진심을 몰라주면 섭섭하다. 때로는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 혼자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그런 나를 보며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이 부끄러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부족함도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실수하고 흔들리는 사람임을 받아들여야 누군가 넘어졌을 때 쉽게 손가락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다시 ‘사람’이라는 말 앞에 서게 됐다.
기자로서 만난 수많은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행정과 정책도 결국 사람의 삶을 위한 것이었고, 갈등과 다툼 역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사를 쓰고 신문을 만든 이유도 화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사건과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다. 이름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웃을 돕는 사람,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 목소리가 큰 사람보다 말없이 책임을 다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귀하게 듣고 싶다.
사람을 생각하다 보니 사랑을 생각하게 됐고, 사랑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예수의 말씀 앞에 서게 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오랫동안 들어온 말씀이지만 일흔 즈음에 마주한 그 뜻은 전과 다르다.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잘못을 덮거나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잘못을 바로잡더라도 사람까지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자리를 남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내 뜻대로 바꾸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일일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사랑받기를 바라는 데는 익숙했지만 먼저 사랑하는 일에는 부족했다. 이해받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존중받기를 바라면서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데는 인색했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다. 미처 전하지 못한 말과 이미 멀어진 관계도 모두 예전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삶의 방향은 지금부터 다시 정할 수 있다.
1956년 10월 6일에 태어난 나는 2026년 10월 6일이면 일흔 번째 생일을 맞는다. 서른 즈음에는 떠나가는 세월을 미처 알지 못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면, 일흔 즈음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사람들을 돌아보게 된다.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보다 누구의 손을 잡아주었는지, 얼마나 옳은 말을 했는지보다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는 어떤 사람으로 다른 이들의 곁에 남을 것인지를 묻게 된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말하기보다 먼저 들으며, 누군가가 다시 일어서는 데 작은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일흔 번째 생일을 앞둔 지금, 나는 다시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사람을 대하며 지켜가야 할 하나의 말씀 앞에 선다.
“서로 사랑하라.”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흔에도 나는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운다.